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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건국과 새로운 기틀

koreavideo 2017. 6. 3. 10:14

1. 조선의 건국과 국가운영 

1. 건국과정 

1) 이성계의 역성혁명 

(1) 1392년 7월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을 내 쫓고 이성계가 개경 수창궁에서 왕위에 오름

(2) 신진사대부와 신흥 무관세력이 연합함

(3) 왕조교체를 반대하는 정몽주 등 온건걔혁 세력까지도 제거함

(4) 과전법 등 서전개혁을 실시하고 새로운 국가 건설 

2) 새로운 국가의 탄생

(1) 국호를 고조선을 잇는 조선 으로 함

(2) 왕조 개창의 정당성을 알리고 민심을 일신하기 위해 수도를 한양으로 옮김

(3) 한양은 한반도의 중앙에 자리 잡고 있으며 수로교통뿐 아니라 방위에 있어서도 매우 뛰어난 곳임

2. 정치동향 

1) 태조 (1) 반대파와 고래 왕족을 몰아내고 통치 구조를 개혁함. (2) 개국공신을 주축으로 한 도평의사사 중심으로 통치, 권한이 더욱 강해짐

2) 태종 (1) 왕자의 난(1398년 , 1400년) 을 통해 방석, 방간과 정도전을 제거하고 도평의사사 혁파 (2) 육조직체계를 통한 왕권 강화, 사병혁파.

3) 세종 (1) 유교정치 실현을 목적으로 국가의 문물제도 정비 (2) 집현전 : 국가의 중요한 제도 마련, 다양한 도서 편찬사업을 주도 

(3) 의정부의 권한 강화, 왕권과의 균형유지. 

4) 문종 : 적장자로서 왕위에 오른 최초의 국왕. 일찍 죽는 바람에 정치적 혼란을 촉발시킴 

5) 세조 

(1) 수양대군은 계유정난(1453년) 을 일으켜 김종서 등을 제거하고 단종의 양위로 왕위에 오름

(2) 사육신 등 반대파의 저항이 발생하자 세조는 더욱 공신과 종친을 중용하고 친위군을 늘림

(3) 강력한 왕권강화. 다시 육조직체계를 실시.

6) 성종 : 훈척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사림을 등용. 사림 은 주로 경연과 언론을 담당함

7) 태조~성종 기간은 정치기구 정비와 양반계층의 정치적 참여가 확대되는 과정이었음

8) 경국대전 : 조선 500년의 기본 법전으로 성동 대에 완성됨 (1481년) 조선의 통치기구와 이를 관리. 운영하는 제도와 질서, 여러 가지 의례와 절차 규정으로 구성

3. 중앙과 지방행정

1) 중앙 행정기구의 기본체계 : 국왕- 의정부 - 육조 - 육조 속아문

(1) 국왕 : 최고 권력자로 정치와 행정에 관여하여 각 관서의 의사를 모으고 조정하는 존재 

(2) 의정부 : 국가의 정책을 의논. 합의하는 최고기구. 정승들은 예문관, 홍문관, 승문원 등 주요 관청의 최고 책임자까지 겸함

(3) 육조 :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하는 기구. 국가의 행정사무를 분담

(4) 삼사 :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을 일컬음. 권력을 견제, 언론을 담당 청요직으로 불림. 왕명을 출납하는 왕의 직속기구.

2) 지방행정 : 일원적인 통치체제로 개편

(1) 향.소.부곡 폐지, 속군.속현 폐지, 군현 통폐합하여 330개로 정비함 

(2) 군헌 - 지방행정단위는 도, 부, 목, 군, 현으로 이루어졌고 모든 군현에는 지방관 파견. - 수령칠사 : 농업진흥, 인구증식, 학교진흥, 군대정비, 공정한 부역과 세금징수, 공정한 재판, 치안확보. - 향리 : 고려때 독자적인 지위를 누렸으나 행정실무자로 지위 격하 

(3) 면리 - 군현 밑에 행정체제 -권농관, 면임, 이정 등을 두어 행정사무, 촌락의 자치적 사무를 담당함

(4) 도 : 관찰사 파견, 지방군현을 지휘.감독, 지방군현의 사정을 중앙에 보고.의견을 개진하는 업무

3) 군사제도 (1) 중앙 : 5위 , 오위도총부에서 통솔

(2) 지방 - 육군 : 도 단위로 1~3개 병영설치. 병영 밑에 거진을 두어 주변의 군현 병력 통솔 - 수군 : 바다를 접한 도마다 1~3개 수영 설치. 수영 밑에 포진.포를 두어 통솔. 

- 병영과 수영의장 : 관찰사가 각각 1개씩 겸임하고 나머지는 병사와 수사가 운영 - 진관체제 : 병.수영 단위로 독립적으로 운영하여 한 개의 주진이 무너지더라도 다른 진은 그대로 유지할 수 있어서 방어에 유리한 군사조직

2. 조선 초기의 사회경제구조 

1.과전법과 전세제도 

1) 과전법 : 조선 건국세력이 고려 말 사전걔혁을 단행하면서 시행한 토지 분급제도 

(1) 주요 분급대상 : 중앙 거주 관인과 지방 유력자

(2) 토지 소유권이 아니 수조권을 지급, 경기지역에 한하여 사전분급 (3) 18등급으로 분급, 지방의 품관은 5~10결의 군전 지급, 수조율은 1/10으로 제한함 (4) 사전을 제외한 토지는 공전으로 국가가 농민에게 직접 수조하는 토지임.

2) 사전개혁

(1) 사전주의 폐단과 세습을 막기 위해 세조 12년, 과전을 물려주는 법을 없애고 현직자에게만 분급 (2) 관수관습제 : 수조권자의 횡포를 막기위해 관에서 직접 조세를 걷고 관리에게 나누어 주는 제도 

(3) 과전법의 전세제도 : 토지수확량 1/10 기준으로 공전, 사전 관계없이 1결당 30말

3) 공법 실시 

(1) 전분 6등법 : 논밭의 비옥도에 다라 1결씩 면적을 차이를 두고 1결당 20말 거둠

(2)연분 9등법 : 농사의 풍흉에 따라 9등급으로 나누어 세율을 조정하여 부과 

(3) 공법의 폐단 : 지주 토지는 실제보다 낮은 등급을 농민 토지에는 높은 등급을 매기는 폐단이 있음

2. 역역과 공물제 

1) 역역 : 국가에서 필요한 노동력을 직접 징발하여 조달, 양인 장정은 무상으로 노동력을 제공할 의무 

(1) 신역 : 사회적 신분에 따라 지는 특수한 역. 16~60세의 양인 남자의 군역이 대부분임

- 보법 : 정군(직접 군사 활동) 과 봉족(비용을 대는 자)으로 구분 세조 대 시행 (1464년) 2정을 1군호로 편성(토지 5결을 1정으로 간주). 노비도 보인에 포함 대토지와 많은 인정을 가지고 있던 관인, 지방 세력가를 통해 군액의 증가를 꾀한 것

- 방군수포제 : 과중한 군역 부단으로 농민의 유망은 물론 지방 세력가와 대지주의 반발도 일어남 군역 대신 베를 거두는 방법으로 방군수포제를 실시함 방군수포가 확산됨으로 인해 정병이 소수가 되어 관군은 유명무실하게 됨.

(2) 요역 : 1년에 며칠씩 강제로 일하는 것으로 1년에 6일 이내의 일을 하도록 정하였으나 잘 지켜지지 않았고, 힘없는 백성이 강제로 요역에 동원됨. 식량과 도구도 스스로 부담토록 함.

2)공물제도 (1) 지방의 특산물이 공물대장에 한 번 등록되면 생산 여부에 관계없이 바쳤어야 했음 (2) 방납의 폐잔 : 토지세보다 과중하였고 중간 이익을 취하는 상인 또는 하급관리 출현 (3) 이이는 공물을 현물 대신 쌀로 거두어서 국가가 필요한 물품을 구매하자고 제안함 - > 17세기 대동법으로 전환됨 

3. 신분과 직역 

1) 인구제도 

(1) 호적 : 3년마다 작성함  기재사항 : 호주의 주소, 본인 지역, 성명, 나이, 사조, 처의 성씨, 나이 및 사조, 자녀의 성명과 나이, 노비 및 고공의 성명과 나이 등 

(2) 오가작통법 : 누호, 협호를 방지하고 호적제도를 강화하기 위한 상호 감시 및 연대책임 장치 

(3) 호패법 : 16세 이상 남자에게 착용케 함. 조선후기에 정착

2) 양천제 

(1) 양반 - 많은 땅과 노비를 소유한 계층, 과거를 통해 관직에 나가는 것이 목표. - 문무관직을 의미하는 양반이 사회계층의 의미로 고정됨 - 양반끼리 통혼하여 지배층으로서의 신분과 지위를 공고히 함 

(2) 중인 - 기술관 : 천문, 지리, 율학 등 전문지식을 갖고 관청에 근무 - 아전. 향리 : 관청에서 행정실무 

(3) 평민 : 대부분 농민이나 상인, 수공업자도 있음. 조세와 공물을 바치고 군역.요역을 부담함

(4) 천민 - 대부분 노비임, 공노비(납공노비, 선상노비), 사노비(솔거노비, 외거노비)- 조선 초기에는 노비의 비율이 높았으며, 공노비보다 사노비가 더욱 어려웠음

- 법적으로 양인이었으나 천대받는 층 : 조졸, 수능군, 목자, 봉수군, 염간 

3. 조선 초기 대외관계 

1. 명과의 사대관계 

1) 조선과 명은 천자와 제후의 관계를 맺고 새 왕의 즉위 대마다 천자의 승인을 받음

(1) 사대는 조선이 취한 자기보전을 위한 현실적 대웅이었음

(2) 명이 조선의 정통성을 문제 삼아 요동정벌을 계획하거나, 4군 6진 개척때도 사대관계를 이용해 피해갈 수 있었음

2. 일본과 여진에 대한 교린정책 
1) 조선은 일본, 여진과는 교린관계를 맺음 : 교린은 사대와 대비되는 외교정책
(1) 대일본관계 
- 당시 일본은 남북조 혼란기였으며 고려 말부터 왜구가 한반도 해안지역에 출몰함 - 세종의 대마도정볼(1419) : 이종무가 왜구 소굴을 소탕함 - 계해약조 ㅣ 삼포개항(내이포, 부산포, 염포) 왜관 서리, 세견선과 세사미의 규정을 체결
- 왜와의 교역은 조공형식었고, 일본 국왕, 대마도주 등 다원적인 통교체제를 취함 - 사행 ㅖ 경제적 교역이 주된 목적. 조선은 외교 임무 수행, 일본은 교역이 더 컸음 조선은 정부에서 파견하였으나 일본은 다양한 교역자들을 파견함 

(2) 대여진관계 
- 회유와 응징을 적절히 이용한 교린정책 구사 : 적의 침략을 대비하기 위한 목적이 큼. - 함경도 , 경성, 경원에 무역소 설치 : 여진(모피, 약재). 조선(쌀, 옷감, 소금 농기구 등) - 4군 6진개척 : 세종 대에 4군(최윤덕), 6진(김종서) 을 개척하여 삼남의 농민을 이주시켜 압록강, 두만강 이남 지역을 완전히 확보함
(3) 유구, 타이, 인도네시아와의 관계
- 유구(오키나와)와는 17세기까지 조공무역 관계유지 - 동남아산인 소목과 후추는 왕실과 양반 관료층이 주요 소비층이었음 -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 태종때 제작한 세계지도. 당시 조선의 세계인식을 알 수 있음

4. 새 왕조를 빛낸 문화와 기술 
1. 한글을 만들다 
(1) 한글창제는 조선 초기의 가장 중요한 문화적 성과 
(2) 목적 : 우리말을 글자로 쉽게 표기할 수 있는 문자의 필요성과 지배층이 백성을 교화하는 훈민정책
(3) 보급 - 용비어천가, 월인천강지곡, 삼강행실도 등을 한글로 간행 - 국왕도 언문 교지를 내리거나 궁중 여성들도 내간(언문편지)를 씀 - 한글 창제 이후에도 양반은 한문을, 관청 서리는 이두를 계속 사용함 - 한글은 평민이나 여자들의 일상 속에 자리 잡음
2. 과학기술의 발전 
1) 천문기상학 
(1) 천문도 제작(태조), 간의대 설치(세종) (2) 이천.장영실 : 대소간의(천문 관측), 혼천의(천체운행관측). 앙부일구, 측우기, 자격루 제작
(3) 정흠지.정초 : 칠정산내외편 편찬 - 내편(서울을 표준으로 작성), 외편(회회력으로 참고용)
2)의학 : 향약집성방(노중래) , 의방유취(김순지 - 향약의술 발달 
3. 농업기술의 발달과 농서 
1) 시비법 개발(지력 향상), 파종법 개선(다모작 가능해짐) 
2) 수리시설 정비 : 매년 상경전이 늘고, 수전의 비율도 높아짐. 북부지역에도 수전 설치 
3) 농서보급 : 농사직설(정초) - 우리나라 최초의 농서, 금양잡록(강희맹) - 개인 편찬 농서 

조선 전기 사회변화와 외세침략
1. 사림.훈구의 대립과 사화
1. 훈구와 사림 
1)훈구파 (1) 건국초기부터 성종 초기가지 중앙 권력을 장악하던 세력으로 주로 공신으로 책봉된 자들이 주측 (2) 정치적으로 고위 관직을 차지하였고 경제적으로 방대한 토지와 노비를 소유함
2)사림파 
(1) 조선 건국 과정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던 재지사족들의 후예 혹은 문인들 (2) 조선 건국 이후에 차츰 중앙정계로 진출하기 시작함 : 성종 대 부터 본격적으로 진출함 (3) 향촌의 중소지주로서 머물면서 향촌 사회의 안정과 지배층으로서 계급적 우위성을 확보하려고 함- 유향소를 다시 세우고 사창제, 향사례, 햐음주례를 실시할 것 등을 주장함. - 사창제는 민간구휼제도, 향사례는 활쏘기, 향음주례는 술 마시기를 일정한 격식 속에서 하며 예법을 지켜나가자는것 

2. 네 차례의 사화. 
1) 무오사화 : 1498년 연산군 
(1) 김종직의 '의제를 조문하는 글'을 김일손이 사초에 올리면서 시작됨
(2) 훈구파는 이를 두고 단종을 항우에게 죽임을 당한 의제에 비유했다고 해석 하면서 사화를 일으킴

2) 갑자사화 : 1504년 연산군 
(1) 연산군의 생모 윤씨의 사건을 연산군이 알게 되면서 일어남
(2) 이 사건에 관련된 신하뿐 아니라 중앙관직에 남아 있던 사람들 까지 처벌한 사건

3) 기묘사화 : 1519년 중종 
(1) 반정을 통해 왕위에 오른 중종이 조광조를 등용하고 그가 실시한 현량과를 통해서 사림들이 대거 중요 관직으로 진출하면서 문제가 됨 
(2) 조광조의 개혁정치에 위협을 느낀 중종반정의 공신들이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세력들을 제거함. 

4) 을사사화 : 1545년 명종 
(1) 중종 말기 후사를 둘러싼 갈등에서 인종의 외척 윤임과 명종의 외척 윤원형의 싸움이 발단이 됨 
(2) 윤원형이 윤임 세력을 제거하려고 을사사화를 일으키면서 그 과정에서 사림가지도 피해를 봄

5) 서원의 역활
(1) 백운동서원 - 1543년에 건립된 최초의 사액서원 - 이황이 편액을 요청하여 소수서원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음 - 사액서원에는 일정한 토지와 노비, 서적을 지급함 - 면세와 면역의 특권까지 부여함 
(2) 서원은 교욱기구였기 때문에 훈구정치 아래에서도 탄압을 받지 않음
(3) 서원은 향약과 같은 사회조직체는 아니었으나 사림이 지방사회에서 기반을 마련하는 구심점이 됨

6) 임꺽정의 난( 1559~1562년 
(1) 양반들의 과다한 토지겸병과 관료들의 과도한 수취로 농민들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짐.
(2) 임꺽정의 난은 조선 전기 최대의 농민저항 (3) 임꺽정의 난은 3년 만에 진압되었지만 중앙정부를 크게 위협함.

2. 도성과 향촌사회
1. 도성의 운영
1) 계획도시 한양
(1) 종묘와 사직, 궁궐 건설, 4개의 산을 잇는 도성을 축조. (2) 4개의 대문 흥인지문, 숭례문, 돈의문 숙정문) 과 4개의 소문 (혜화문, 광희문, 소의문, 창의문) 
(3) 육조거리 : 경복궁 앞의 대로 좌우편에는 의정부 육조 등 주요관청을 배치함 . 
(4) 종로. 남대문로 양편에는 시전을 마련하여 상인들에게 임대해 줌 : 국가 소요 물자를 원활하게 조달하고 서울의 거주민들에게 생활용품을 공급할 수 있도록 함
2) 한양의 행정체계 
(1) 한성부 아래 부, 방으로 이어지는 행정 편제와 행정 계통을 가짐 (2) 지배층인 관료 양반층들은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 양지바른 북촌 지역을 중심으로 거주. 
(3) 관청의 하급 실무자인 아전들은 각자가 근무하는 관청 주변에 거주지를 마련함
(4) 상인들과 군인들은 상점이 있는 종로와 개천(현 청계천) 근처에 살았음 (5) 세력을 잃은 양반들은 남산 산록 이른바 남촌에 주로 거주하게 됨.

2. 향촌사회의 운영
1) 사족들의 거주 
(1) 16세기 이후 토지가 본격적으로 개발되고 농지가 확대되면서 사족마을을 중심으로 주변의 자연촌을 묶어 리로, 또 몇개의 리를 묶어서 면으로 편제함
(2) 사족들이 리 단위로 동계, 동약 등을 조직하는 것도 촌락민들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고 수령권의 마을을 대한 통제를 방어 하려는 목적
(3) 개간을 중심으로 토지를 넓혀나가고 노비를 이용하여 경작하여 사족들의 권력을 유지함 

2) 향약
(1) 송나라 11세기 후반 여대균 형제들이 향리 전체를 교화하고 선도하기 위해 창안한 향촌자치규약
(2) 주자가 향촌을 교화하기 위해 여시향약을 조금 손질하여 주자증손여시향약 을 만들었음
(3) 사림파가 중심이 되어 향약을 시행하면서 내세운 향촌 안정책은 수령이 함부로 농민을 수탈하지 못하게 견제하고 관권과 연결된 토호의 횡포를 통제하며 사족의 수탈을 절제하려 한 점에서 농민을 보호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