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석기 시대의 대표적인 유물, 주먹도끼. - 돌보습, 빗살무늬토기, 돌괭이는 신석기 시대 유물이다. 구석기 유적, 상원 검은모루동굴, 평양 용곡동 동굴, 단양 금굴.
구석기인들의 생활모습. 수렵과 채집으로 먹을 것을 얻었다, 동굴이나 바위 그늘 등에서 살았다. 불을 채취하여 이용하였다.
신석기시대의 생활모습 흙으로 토기를 빚어 사용했다.
고조선은 우리 역사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고대국가이다. 고조선의 존재는 중국의 고대 문헌들에 전하고 있는데, 그 기록들에서 고조선은 기원전 7~6세기에 존재하였음이 확인된다. 기원전 4~3세기에는 조선의 지배자가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연나라 등과 겨루며 상당한 세력을 이루었다. 시조는 단군왕검이다.
한반도 남쪽에서 오랬동안 소국 연합의 형태로 존재했던 나라는 마한, 진한,,
백제 성왕은 수도를 사비(충남부여)로 옮겼다. 불교를 일으켜 사상적 통합을 꾀하였다, 중앙에 22부 지방에는 5부와 5방을 설치했다.
고조선은 세력을 확대하면서 영역을 넓혀갔다. 요하를 경계로 연과 대립하였다. 연의 침략을 받아 중심지를 한반도로 옮기게 되었다. 고조선은 한나라에 의해 멸망하였다.
삼국시대 소를 이용한 쟁기 농사가 보급되어 수확량이 늘어났다. 많은 인력을 동원하여 수리시설을 만들었다. 국가는 농업을 장려하였다. 모내기법은 조선시대에 널리 보급되었다.
신라 골품제는 골과 품으로 신분을 나눈것이다, 왕족과 최고 귀족은 성골이나 진골이 독점하였다. 진골은 관등의 최고위 까지 오를 수 있다. 공로를 세웠다고 하더라도 6두품은 올라갈수 있는 관직이 한정되어 있었다.
신라의 토지제도는 녹읍과 시급이었다. 전시과는 고려의 토지제도 였다. 신라는 골품제가 철저하게 지켜지던 사회였다.
발해 역사와 문화를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곳은 정혜공주묘, 정효공주묘.
신라 삼국통일 과정 대동강 이남을 차지하는 데 그쳤다. 고구려, 백제 유민들을 포섭했다. 전쟁을 주도한 무열왕과 문무왕은 왕권을 강화했다. 신라는 당나라와의 연합으로 삼국통일을 이루었다.
통일신라 사회상 귀족들은 많은 노비를 소유하고 사병을 길렀다. 과중한 부담을 견디지 못한 농민들은 몰락하였다. 귀족이나 사원은 대규모 토지를 소유하였다. 금입택, 사절유택 등은 귀족들의 호화 주택이다.
고려가 후백제를 마지막으로 굴복시킨 전투지는 황산(충남 논산)
고려전기 거란과의 관계. 서희는 거란과 담판하여 강동 6주를 차지하였다.
강감찬은 귀주성에서 거란에게 대승을 거두었다. 강조가 정변을 일으키자 거란은 이를 구실로 쳐들어 왔다. 거란과 귀주대첩 이후 침략을 그만두고 고려와 화친하였다.
강조정변 천추태후, 목종, 헌종,
몽골침략시기 고려사회 최고 집권자 최이는 강화도로 수도를 옮겨갔다. 강화에서 귀족들은 안락한 생활을 누렸다. 몽골 침략을 물리치고자 대장경을 판각했다. 몽골의 침략시기 무신권력은 그들의 지배하에 있었다.
고려말 신돈의 행적. 공민왕이 신돈에게 국정을 전담하게 하였다. 신돈은 왕권강하에 앞장섰다, 신동은 전민변정정책을 시행했다. 신돈이 반역혐의로 숙청된 지 2년후, 공민왕도 피살된다.
보덕국 674년 (문무왕14) 에 금마저(현재의 전북익산) 에 세운 고구려 유민의 나라(674-683)
안승은 고구려의 마지막왕인 보장왕의 서저 혹은 외손이라고도 하고 혹은 연개소문의 동생인 연정토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고구려의 유민 검모잠은 고구려 부흥운동을 일으켜 안승을 받들어 왕을 삼고 고구려 의 유민들과 함께 당나라에 대항하였다. 이대 안승이 신라에 원조를 청하자 신라에서도 당나라의 세력을 쫓아낼 필요가 있었으므로 안승을 금마저(익산)에 살게 하고 고구려왕으로 봉하여 양미등을 보내 주었다. 안승은 그 후에 보덕왕의 봉작을 받고 문무왕의 조카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신라는 683년 (신문왕3)에 안승을 경주에 불러들여 벼슬과 토지를 주고 신라의 귀족으로 삼았다. 이러한 조치에 금마저에 남아 있던 장군 대문은 반란을 일으켰으나 신라군에 의해 진압되면서 보덕국은 사라졌다.
고려시대에 국가의 정책, 국왕의 명령을 담은 조칙, 행정과 사법의 관례, 관행 등 법제와 격식을 관리 식목도감.
조선 전기에 편찬된 관찬사서 고려사, 동국통감, 고려사절요. 조선후기, 발해고 유득공이 저술한 책.
조선이 한양을 수도로 정한 적절한 이유 , 한반도의 중앙이라는 지리적 이점. 한강이 있어 수로교통이 편리한곳 .
조신조 민본정치를 표방한 제도. - 흉년에 조세를 감면하였다.. 훈민정음을 만들었다. 신문고를 설치하였다.
조선시대 실학자의 활동을 시대 순으로 - 유형원 - 이익 - 정약용 - 최한기
1862년 농민항쟁 은 진주에서 환곡문제로 인해 발생한 것이다. 농민항재 참여계층은 일부 양반과 부민, 그리고 대부분의 소빈농이었다. 당황한 정부는 처음에는 회유와 탄압이라는 양면책을 쓰다가 나주에는 강력하게 탄압하였다. 또한 삼정이정청을 설치하는 등 부세개혁을 하겠다고 하였으나 이것은 미봉책에 그쳤다.
17세기 이후 [주자가례]에 따른 종법질서가 확룁되면서 변화된 가족제도는 친영례(신랑이 신부집에서 혼인) 자녀차등상속제, 장자봉사제.
조선 숙종 대에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붕당을 자주 교체하던 통치방법은 환국.
1930년대 일제의 전시수탈에 맞선 혁명적 농민조합 운동가들의 주요활동은 농민의 생존권을 위협하던 고율의 소작료 인하뿐만 아니라 공과금 납부거부, 군수용물자 강제수매 반대, 부역동원 반대운동을 벌였다.
해방 직후 조직된 건국준비위원회 새 국가 건설을 준비하기 위한 과도적 기구였다. 건준에는 친일반민족자를 제외한 모든 세력을 포함하려 했다, 건준은 곧 진주하게 될 미군을 상대로 통일된 정부로서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보수우익세력인 한민당은 이승만을 지지했고 김구 등의 충칭 임시정부 세력은 한독당을 결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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