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성립과 발전
고려의 성립과 발전
1. 고려의 건국과 후삼국 통일
1. 고려의 건국
1) 왕건
(1) 송악의 호족 왕륭과 왕건 부자는 후고구려 궁예의 휘하로 들어감
(2) 918년 신숭겸, 홍유, 배현경, 복지겸 등이 정변을 일으켜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왕으로 추대함
(3) 왕건 집안은 송악에 근거를 두고 세력을 떨치던 호족으로 무역과 상업을 통해 세력을 키움
2)고려의 건국
(1)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뚯을 지닌 국호임
(2) 수도를 송악으로 옮겨 개경이라고 함
(3) 호족들과 혼인 관계를 맺어 관계를 돈독히 하여 세력을 확장함
(4) 민생안정 : 조세와 부역의 부담을 덜어줌. 양인이었다가 노비가 된 경우는 다시 양인으로 되돌림
2. 후삼국 통일
1) 후백제, 신라와의 싸움
(1) 신라의 대야성(경남 합천), 고창(경북 안동)을 침범하여 고려가 군대를 보내 물리침
(2) 후백제가 신라의 경애왕을 죽이고 경순왕을 옹립함
(3) 후백제 내부에서 왕위를 둘러싼 다툼이 벌어지자 감금되었던 견휜이 탈출하여 왕건에게로 투항함
(4) 견휜의 투항소식을 알고 경순왕은 고려에 항복함
(5) 일선군(경북 선산) 일리천 전투 : 고려와 후백제의 마지막 전투 - 936년 후삼국 통일
2) 통치 제도 (1) 고구려에 대한 계승 의식을 내세움 (2) 혼인정책 : 29명의 부인을 둠 (3) 호족에 대한 제도 - 지방의 통치권을 위임하는 사심관 제도 - 호족의 아들을 걔경에 두게 하는 기인제도 (4) 북방 개척과 서경(평양)을 중시하는 정책 추진, 발해 유민도 받아들임
2. 고려의 짖배 체제와 사회
1. 호족 억압과 왕권 강화
1)태조 : <훈요 십조>를 자손들에게 남겨 국가 통치 질서 수립의 기본방향 제시
2) 광종
(1) 호족을 꺽고 왕권을 강화함. 노비안검법과 과거제 실시(호족 세력 약화)
(2) 독자 연호 사용, 개경을 황도, 서경을 서도라고 부름
(3) 불교 적극 지원. 토지제도인 전시과를 처음 정함
3) 성종 (1) 최승로의 <시무 28조>를 받아들여 유교 이념에 의한 통치 시행
2. 지배 체제의 확립
1) 중앙통치기구
(1) 3성 6부제 : 당의 제도를 받아들였으나 중서문하성을 둔 독자적인 운영방식을 취함
- 중서문하성 : 수장은 문하시중. 최고의 정무기관임. 국가 정책을 결정
-상서성 : 6부(이.호, 예, 병, 형, 공)가 속해 있으며 중서 문하성을 둔 독자적인 운영방식을 취함
(2) 중앙 주요기관 -. 중추원 : 군사기밀과 왕명출납 -삼사 : 재정회계 - 어사대 : 관리감독
(3) 중서문하성의 낭사와 어사대의 개관은 언론을 담당. 관료들의 부정과 비리를 규찰 탄핵하기도 함.
(4) 도병마사 - 재상들이 모이는 회의 기관으로 고려 독자 기구. - 중서문하성(재신)과 중추원(추신)의 회의로 국방, 군사문제 논의하고 결정함
(5) 식목도감 : 도병마사와 같은 구성. 대내적인 법제와 격식 등을 정함
(6) 음서제도 - 5품 이상의 관리의 경우 그 아들, 동생, 조카, 사위도 관직을 얻을 수 있는 혜택. - 음서제도는 귀족들의 특권을 보장해 주는 제도임.
2) 지방 통치 기구
(1) 현종 때 정비 ㅣ 나라를 개경과 경기, 남쪽지방, 북쪽 변경지대의 세 부분으로 나눔
- 북쪽 변경지대 : 외적 방어를 위해 양계(북계와 동계)를 설치, 병마사 파견
- 기타 지역 : 도로 나누고 도 밑의 중요지역에는 도호부, 목, 경 등을 설치 - 도에는 안렴사나 안찰사가 1년 중 몇 달 동안 순회하며 지방 관리들을 감시함
- 일반 업무는 군.현에서 모드 이루어짐. 지방관이 파견되지 못한 곳은 속군. 속현이라고 함
-지방의 행정실무는 그 지역 토착세력인 향리가 담당하였음
(2) 군사제도 : 중앙(2군 6위), 국경지대(주진군-외침대비), 지방(주현군-방법, 반란 대비)
3. 전시과와 수취
1) 전시과
(1) 모든 관리에게 품계에 다라 토지를 분급하는 제도로 전지와 시지를 지급( 전지 : 농경지, 시지 : 수풀 천박한 토지)
(2) 전시과의 개정 : 경종대부터 시행되고 몇 차례 개정을 거쳐 문종대 최종 제도 마련 처음에 중앙과 지방 세력은 그 정도에 따라, 관리는 벼슬등급에 따라 지급하다가 점차 관리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지급하는 토지의 양은 줄이고 현직관리 중심으로 지급하게됨
(3) 전시과의 종류 : 지급 대상에 따라 궁원전(왕실), 양반전(문무관), 군인전(군인), 공해전(관청) 등이 있고 양반전과 군인전의 비중이 컸음.
- 양반전 : 문무양반의 18등급에 따라 차등 있게 토지를 지급함. - 공음전 : 5품 이상 관료에게 양반전 외에 지급한 토지 공음전은 세습이 가능한 토지로, 음서와 감께 귀족의 특권을 보장하는 장치.
2) 수취제도
(1) 수조권 - 관리들은 자신의 지급받은 토지를 결작하는 농민에게 수확하는 1/10을 거두는 수조권을 받음. - 관리들은 수조권을 자기 소유의 토지에 받아 자신들이 내야 할 전세를 면제 받음
(2) 농민 : 생산의 1/10을 전세로 부담. 요역의 의무와 함께 공물(베나 특산물) 도 부담함
(3) 조세와 공물은 조운(한강과 서. 남해안 수로를 이용)을 통해 개경으로 운반함. 조창이 관리, 그 밖의 국가 기관의 필요 물품은 관청 장인 또는 소(특정물품 생산지)에서 생산 조달함.
4. 신분
1) 지배층 (1) 문반가문 > 무반가문> 하급관직의 가문. (2) 귀족들은 귀족 및 왕족들과 혼인 관계를 맺어 문벌을 형성하고 가문의 품격을 높임
(3) 문벌귀족 : 가문단위로 정치세력을 형성, 대토지 소유, 중앙 고위직을 장악하여 세력 강화 (4) 지방호족 : 집권체제의 확립에 따라 지방 향리로 편제. 호장, 부호장, 과거로 중앙 진출
2)피지배층 : (1) 향.소.부곡 : 향과 부곡민(농사에 종사), 소의 주민(공납 물품 생산에 동원) (2) 역.관.진 : 역(교통 요지), 관(숙박시설), 진(강변 주요 나루터)의 주민들도 천시 받음 (3) 노비 : 공노비(관청 소속)와 사노비(개인 소유), 솔거노비와 외거노비(거주형태)
3. 대외 관계와 교역
1. 고려초의 국제정세
1) 고려 건국부터 후삼국 통일 시기 중국은 5대 10국의 분열기였음
(1) 요건국 : 916년 부족을 통합하고 926년 발해를 멸망시키고 947년 요나라 건국
(2) 송건국: 후주 절도사 조광윤이 중국을 다시 통일하고 송을 건국
2) 고려는 서북변경에 성을 쌓고 30만의 광군을 조직하여 거란 침입에 대비함
2. 요의 침략
1) 거란의 제 1차 침입과 서희의 강동6주 획득
(1) 993년 소손녕이 침공했으나 청천강 하류에서 격파함
(2)요는 회담을 제의, 서희는 고구려의 겨ㅖ승자임을 내세워 강동6주를 고려의 땅으로 인정받음
(3)강동6주 : 압록강과 청천강 사이의 흥화진, 용주, 철주, 귀주, 통주, 곽주
2) 거란의 제 2차 침입(1010)
(1) 거란은 목종을 폐위하고 현종을 세운 강조의 죄를 묻는다는 구실로 침공함
(2)고려의 강력한 저항에도 거란은 개경까지 점거 하였으나 식량보급로가 끊기고 포위 위협으로 회군함
(3) 이후 고려와 요는 화친을 맺었고, 송나라는 고려와 긴밀한 관계를 맺으려 함
3) 강감찬의 귀주대첩 : 거란의 제3차 침입(1018)
(1) 거란은 고려왕이 직접 조공하지 않고 강동6주를 반환하지 않는다는 구실로 침공함
(2) 고려의 강감찬은 귀주에서 소배압의 10만대군을 격멸함
(3) 거란을 물리친 뒤 1세기 간 평화유지, 고려의 국제적 위상도 높아짐
2. 여진의 침략
1) 여진의 발흥과 금 건국
(1) 11세기 말 여진 세력이 고려 변경을 위협하며 1세기 동안의 평화가 깨짐
(2) 1115년 아골타가 금을 세우고 요를 명망시키고 송의 수도를 함락, 송은 남쪽으로 이전
2) 윤관의 별무반과 동북9성
(1) 별무반 : 여진에 대항하기 위한 기병부대. 윤관의 건의로 편성. 농민, 승려, 상인, 노비도 참가함
(2) 동북9성 : 1107년 동북변경지대의 여진을 몰아내고 9성을 쌓아 백성들을 이주시켜 살도록 함
3. 대외 교역
1) 고려시대는 대외교역이 가장 활발했던 시대임
2) 대송 교역 (1) 광종 13년에 송과 공식 무역시작. (2) 거란과의 관계로 공무역은 단절과 재개가 반복되었으나 민간무역은 계속 활발했음
3) 벽란도 (1) 예성강 어귀에 위치하여 국제적인 무역항으로 발전함 (2) 거란, 여진, 일본, 사라센과도 교역함
4. 고려 전기의 사상과 문화
1. 정치 이념과 유학
1) 고려에서도 유학은 정치이념의 기능을 함
(1)과거제(광종) : 시험으로 관료를 선발하여 통치체제 강화
(2) 시무28조(성종) : 최승로 유학이념에 따라 통치할 것과 체제정비를 위한 정책 건의함
2) 교육기관 설립
(1) 공적 교육기관 : 국자감과 향교 설치(유학을 배우고 과거에 응시하여 관료로 나아감)
(2) 사적 교육기관 : - 12개 학당(12공도)이 있었음 - 최충이 세운 학당은 문헌공도 또는 9재학당이라 함. - 고위 관료 또는 지공거 출신 인물들이 사학 설립 : 귀족 자제들이 몰려듧.
3). 학벌 형성 : 좌주(시험관)와 문생(급제자) 은 부자관계와 같이 출하 후에도 정치적 영향력 행사
4) 삼국사기 (1) 1145년 왕명으로 김부식이 편찬한 사서 (2) 유교적 역사관에 입각하여 신라를 중심으로 삼국의 역사를 기록함
2. 불교와 대장경 조판
1) 불교는 고려시대의 국교 : 태조의 훈요 10조에서도 가장 먼저 불교를 강조함.
2) 풍수지리설 (1) 신라 말 도선이 체계화함 (2) 송악을 중심으로 전국을 패편성한 새로운 인식 (3) 도참설과 결부되어 표청의 난과 같은 정치적 사건에 많이 이용됨
3) 고려의 불교 예술
(1) 고려 초 지방 호족을 중심으로 대규모 불상이나 석탑 등이 조성됨 (2) 은진미륵(논산 관촉사), 미륵불(파주 용미리), 안동 제비원 석불 : 자연암석 이용, 소박한 모습 (3) 연등회와 팔관회 : 가무유희로 부처와 천지신명을 즐겁게 하고,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였음. (4) 불상 조성, 탱화 봉안, 불경 사경 등 불사가 귀족들 사이에 성행함
4) 고려 불교
(1) 광종의 불교 정책
- 사원과 승려들을 교종과 선종으로 나누어 정리하고 국가에서 통제함
- 승과 : 교종과 선종으로 나누어 시험을 봄. 입격자에게는 전시과 지급. 승직도 여러 등급으로 나누었고 맨 위에 왕사와 국사를 둠
(2)교선일치 : 고려중기 대각국사 의천은 교학연구와 수행을 같이 할 것을 주장하고 천태종 개창
(3) 대장경 - 대장경 판각 시작(현종, 거란침입) - 초조대장경 완성(선종, 1078년, 몽골 침입으로 소실) - 재조대장경(팔만대장경, 몽골침략 물리치기 위해 강화도에서 조성) - 속장경(의천이 불교연구소 수집하여 간행, 몽골침입으로 소실)
고려 후기의 사회 변화
1. 귀족사회의 동요와 무인집권
1이자겸의 난
1) 이자겸의 가문 (1) 무벌귀족 가문 중 고려초 최고의 권세를 누림 (2) 이자겸은 조선국공이라는 작위를 받았고, 그의 집은 의친궁이라고 불림
2) 이자겸의 난 (1) 이자겸의 권력을 제지하려던 인종을 독살하려고 함 (2) 인종이 이자겸과 측근인 척준경 사이를 갈라놓아 이자겸을 제거함 (3) 이자겸 세력은 제거되고 왕권은 강화 되었지만 정치는 어지러워짐
2. 서경천도운동
1) 서경파 : 관료 정지상, 승려 묘청, 일관 백수한 등
(1) 개경은 지덕이 쇠토했고 서경에 왕기가 있다' 고 하여 서경천도를 주장함
(2) 서경 천도로 개경의 문벌귀족 세력을 무너뜨릴 생각
(3) 당시 정권을 쥐고 있던 세력은 금과 군신관계를 누리고 있었음.
(4)서경 천도를 주도했던 인종이 결정을 철회하자 1138년 군사를 일으킴
2) 개경파 : 김부식 세력, 인종의 외척 정안 임씨 가문등
(1)서경파의 난이 일어나자 김부식이 총대장이 되어 토벌군을 지휘함
(2) 서경을 포위하고 1년 넘게 대치한 끝에 묘청 일파를 진압함
3. 무신정변
1) 문신과 무신의 갈등
(1) 무신들은 정 3품까지만 오를 수 있었고, 전쟁터에 나가도 문신의 지휘를 받는 전투기술자에 불과함 : 거란과 여진을 물리친 서희, 강감찬, 윤관도 모두 문신이었음
(2) 문신들에게 지급할 토지가 부족하자 하급 문신인 군인에게 지급된 군인전을 빼았아 나누어줌
(3) 전쟁이 끝난 후 평화가 찾아오자 무신들은 문신들의 호위병 노릇을 함
2) 무신의 난 발생
(1) 의종의 보현사 행차에서 젊은 문신 한뢰가 나이많은 대장군 이소응의 빰을 때림
(2) 이미 정변을 계획하고 있던 무신들은 문신의 관을 쓴 자들을 닥치는 대로 죽임
(3) 무신들은 의종을 쫓아내고 그의 동생을 왕(명종)으로 앉힘
3) 무신들의 내분과 정권 장악
(1) 정변에 성공한 무신들은 중요 요직을 모두 차지함
(2) 정중부와 이의방의 권력다툼에서 정중부가 이의방을 제거하고 권력을 쥐게 됨
(3) 경대승이 다시 정중부 일당을 몰아내고 일부 문신들도 등용함
(4) 경대승은 신분의 위협을 느껴 도방이라는 사병 집단을 두어 신변을 경계하고 정권을 유지함
(5) 경대승 사망 후 이의민이 정권을 쥐게 됨
(6) 이의민은 개경에 돌아와 권력을 장악하였으나 취충헌의 동생 최충수의 기습으로 죽음
4. 최충헌, 최이의 집권
1) 최충헌의 1인 독재체제구축
(1) 무신집권 이후 사회가 크게 불안함을 느끼자 권력을 잡은 최충헌은 <봉사 10조>를 올림 : 무신들이 멋대로 설치한 기관을 줄이고, 지방 향리 세력 견제, 관료의 기강 확립등의 내용
(2) 동생 최충수가 딸을 태자비로 들이려 하자 동생을 죽임
(3) 왕도 갈아치워 명종을 내쫗고 신종을 왕으로 세움
(4) 사병집단인 도방을 강화하여 자신을 호위하게 함
(5) 최충헌은 자신의 집에 교정도감이라는 새로운 기구를 두어 인사와 행정을 모두 처리함
2) 최이의 권력세습
(1) 최충헌이 빼았은 토지와 노비를 돌려주는 등 선심을 쓰기도 했으나 바로 권력 강화에 나섬
(2) 재산을 늘리고 사병을 강화하고 삼별초라는 호위부대도 조직함
(3) 정방을 두어 인사와 행정을 맡기고 서방이라는 기구를 두어 학자, 문신들을 모아 정치에 활용함
(4) 1230년 몽골이 침략해오자 항전의 뜻을 밝히고 강화로 천도를 강행함
(5) 최씨의 집권은 최항, 최의까지 4대 60여년간 지속됨
5. 농민, 천민의 봉기
1) 전국 곳곳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남
(1) 수치와 부담의 고리대, 지방관들의 지역민에 대한 수탈 등으로 인해 발생함
(2) 서경과 서북지역은 서경 천도 운동이후 중앙 정부에 대한 반감이 더욱 컸음
(3) 대표적인 농민봉기 : 1176년 공주 명학소 봉기 (망이와 망소이의 봉기) , 1182년 전주봉기 , 1193년 김사미와 효심의 봉기, 1202년 신라 부흥 봉기 , 백제 부흥 봉기
(4) 노비들의 봉기 : 취충헌의 노비 만적의 봉기
2. 몽골의 침략과 항전
1. 몽골의 침략
1) 13세기 동북아 정세
(1) 징기즈칸 : 13세기초 몽돌 부족을 통합한 태무진은 징기즈칸이 되어 1206년 서하와 금을 공략함
(2) 몰골과 고려 : 고려는 1219년 강동성에 웅거한 거란족을 몽골군과 연합하여 함락시킴
2) 저고여 피살사건 : 고려에 막대한 공물을 요구하던 사신 저고여가 피살당하자 몽골은 고려의 소행으로 보고 국교를 단절함
2. 강화 천도와 항전
1) 몽돌의 1-6차 침입
(1) 1차 : 1231년 - 살리타이가 대군을 이끌고 침략 - 개경 및 서북면 40여개 성에 72명의 다루가치(절령지에 파견한 관리) 두고 철수 (1232년) . -최이흔 강화도로 천도 결심함.
(2) 2차 1232년 - 다루가치 살해 건과 강화도 천도를 문제 삼아 쳐들어옴. - 살리타이가 전사하자 몽골군은 철군함.
(3) 3차 : 1235년 - 2차 침략 패배에 대한 보복성 공격 - 대구 부인사 대장경 소실, 경주 황룡사 구층목탑 소실. - 불교 신앙으로 몽골군을 물리치려는 기원에서 대장경 판각 사업이 시작됨. - 남경(서울)의 백성을 강화도로 옮기고 각지의 산성에 방호별감 파견하여 침략에 대비함
(4) 4차 1247년
- 국왕천도와 개경환도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구실로 침입함
- 황해도, 평안도 지역을 노략하다 황제(정조) 가 사망하자 철수함
(5) 5차 1253년 - 4차 침입때의 조건을 압박하였으나 고려가 버티자 침입함. - 추주성의 빛나는 전과도 있었으나 전국이 쑥대받이 되고 백성들의 고통이 극심해짐
(6) 6차 : 1254년 - 몽골에 항복한 관리를 처형한 것을 빌미로 침입 - 강화도를 압박하기 위해 철저하게 내륙을 유린함. 포로 20만을 비롯해 많은 사상자 발생. - 1258년 김준(김인준)과 임연 등이 최의를 살해하여 최씨 정권을 무너뜨림.- 1259년 몽골과의 교섭으로 개경환도와 태자 입조를 약속함.
3. 고려와 원의 강화.
1) 원종과 쿠빌라이의 담합
(1) 쿠빌라이는 고려를 침공하지 않겠다고 약속함.
(2) 원종은 몽돌과 강화를 맺고 몽골군을 끌어들여 김준, 임연 등 무신세력을 제거함.
2) 원나라와 고려
(1) 원종은 1270년 6월 개경으로 환도함 (2) 원나라로 국호를 세운 몽돌제국과 혼인관계를 맺음. (3) 이후 왕의 이름에 원나라에 충성하겠다는 뜻의 충이 들어가게됨.
4. 삼별초의 난
1) 삼별초 : 초기에는 치안과 방법을 위한 사병으로 , 최이가 설치한 야별초에서 시작됨 이후 숫자가 증가하며 좌별초, 우별초, 신의군의 삼별초로 확대됨
2) 삼별초의 난.
(1) 몽돌과의 화와 개경천도 이후 삼별초 해산령을 내리자 삼별초는 이에 불복하여 난을 일으킴
(2) 배중손, 노영희 등이 몽돌에 대한 결사항전을 명분으로 강화도를 장악함.
(3) 근거지를 강화에서 진도, 다시 제주로 옮기면서 항전함. (4) 삼별초는 남해안 일대의 조운을 장악하고 조정의 재정에 피해를 줌
(5) 진도를 기습당한 삼별초는 큰 피해를 입고 김통정이 지휘하여 제주로 근거지를 옮김
(6) 1273년 4월 여몽연합 토벌군에 의해 3년에 걸친 삼별초의 항쟁이 끝이남.
3. 원 간섭기의 고려
1. 원의 간섭
1) 원나라의 고려 속국화 정책
(1) 고려왕은 원의 공주와 혼인하여 원의 부마국이 되고 제후국으로 격식을 낮춤
: 고려전기, 오교상 송나라에 제후국을 청했으나 고려는 실제로는 황제국 체제를 갖추고 잇었음
(2) 왕실에서 몽골어를 사용하고 복장과 머리도 몽돌식으로 함 : 몽돌풍 유행
(3) 정동행성 : 일본 정벌을 위해 설치한 기관인 정동행성을 그대로 두고 이를 통해 고려의 내정을 간섭하고 직접 통치하려고 하였으나 고려의 완강한 반대로 실현되지는 못함.
2) 원의 고려 영토 직접 지배
(1) 쌍성총관부 : 동북변경지대에 설치 (2) 동녕부 : 자비령 북쪽 60여개 성을 빼앗아 설치 (3) 탐라총관부 : 삼별초를 토벌한 후 제주에 설치 일본과 남송 정벌의 전초기지로 삼으려 했으나 고려의 요청으로 되돌려줌
2. 권문세가와 농장
1) 권문세족 : 원 간섭기의 지배세력
전기의 문벌귀족은 '가문의 지위'를 바탕으로 형성, 권문세족은 오랜 정변과 전쟁을 거치면서 관직과 권력을 끝까지 유지하여 살아남은 경우(정안 임씨, 경주 김씨, 파평윤씨) 또는 무신집권기에 관리가 되었거나 원과 결탁한 자 등 다양한 경로로 권문세족이 됨)
2) 권문세족의 지배 체제
(1) 도평의사사 : 도병마사를 상설기관화 함. 구성원 수도 70-80명으로 늘어남
(2) 권문세족은 문벌귀족처럼 고위관직을 독점하고 왕실 또는 다른 권문세족과 혼인하며 원과 결탁여 세력을 공고히 함
3) 권문세족의 경제적 기반 : 토지
(1) 권문세족은 전후 버려진 토지, 황무지 ㅐ간, 타인의 땅을 빼앗는 방법으로 토지를 늘려나감
(2) 사패 : 일정 지역의 토지와 백성을 지배할 수 있는 권리로서 권문세족들은 사패를 사칭하여 백성들을 괴롭히고 토지를 빼앗음
(3) 농장 경영 : 대규모 토지를 농장으로 경영하면서 세금을 내지 않고, 농민들도 농장에 소속시켜 부역에서 제외시키는 등 노비처럼 지배함 - > 재정과 국력 약화 초래함.
3. 개혁운동
1) 충선왕의 개혁
(1) 권문세족의 기반을 약화시키고 관리의 임명을 개선하여 왕권을 강화하려함.
(2) 한림원을 사림원으로 고치고 개혁의 기반으로 삼으려 함
2) 원과 권문세족의 대응
(1) 원과 권문세족은 개혁 시도를 압박하고 방해하며 세력기반을 지키고자 함
(2) 원과 권문세족도 지나친 백성 수탈을 일부나마 시정하려고함
3) 공민왕의 개혁
(1) 자주성 회복 -몽골식 복장과 머리를 버림 - 권문세족의 토지 침탈과 부당한 인사 관행 시정. - 덕망 있는 학자 기용.
(2) 반원정책 : 친원파 속출, 원의 연호 폐지, 관청명 복구, 정동행성 폐지, 쌍성총관부 공격 철령 이북 수복.
(3) 신돈기용 -. 홍건적의 침입 이후 2차 개혁을 추진하며 승려 신돈을 기용함. - 군사조직 재편성 : 근무기관에 따라 관리 승진 -> 권문세족 견제, 왕권강화 목적
- 전민변정도감 : 권문세족들이 불법으로 빼앗은 토지를 돌려줌, 농장의 백성도 양인으로 회복시켜 줌.
4) 명과 수교추진
(1) 권문세족의 반격으로 신돈이 처형되고 공민왕이 살해되며 개혁은 중단됨 : 권문세족 재집권
(2) 신흥사대부 : 권문세족에 맞선 새로운 정치세력, 친명외교 표명, 사회제도의 개혁 추진 (3) 왜구 토벌 : 최영, 이성계 등 왜구 토벌에 큰 공을 세우면서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부상.
5) 성균관 증건 : 신흥사대부들이 진출한 공간 마련 - 이색, 정몽주, 권근 등 신인이 관직 진출함
4.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1. 불교결사와 팔만대장경
1) 고려 중기의 불교
(1) 교종(화엄경과 법상종) 과 선종(천태종과 조계종)이주도
(2) 왕실이나 귀족과 특별한 관계를 맺으며 대토지와 재산을 소유하고 세력을 확장함 : 무신정권에 의해 귀족가문과 연결된 사원들은 탄압을 받고 크게 위축됨
2) 선종의 결사
(1) 보조국사 지눌의 수선사 결사
-정혜쌍수(참선과 지혜를 같이 닦음)를 실천하는 정혜결사는 팔공산 거조암에서 시작함
- 수선사 : 길상사 (순천 송광사)에서 지식인 중심의 결사 계속. 왕실과 최씨정권의 후원
- 교선 대립문제 해결 : 지눌에 이르러 한국 선 사상의 전통이 확립됨
(2) 백련사 : 정토신앙을 바탕으로 강진에서 승려 요세가 시작함 염불수행 강조, 백성들의 호응을 얻음
3) 대장경 판각사업
(1) 몽골 침략 중에 대장경 등 불교문화재 소실, 최이가 다시 대장경 조판 사업을 벌임
(2) 강화에 대장도감을 설치, 1236년 부터 16년 동안 팔만대장경을 다시 판각함
(3) 강화도 서문 밖 대장경판당에 보관(조선 태조 때 합천 해인사로 옮김)
2. 원 간섭기의 사회와 문화
1) 전쟁 전후 백성들의 수난
(1) 오랜 기간 몽골과 전쟁을 치르면서 많은 사람이 포로로 붙잡혀 감.
(2) 몽골과 강화를 맺은 고려는 고려 포로들을 되찾아오려 하지 않음
(3) 원의 요구에 따라 많은 공물과 함께 공녀와 환관도 바치게 됨 : 조혼 풍습이 생겨남
2) 고려와 몽골의 풍습이 뒤썩이게 됨
(1) 연지곤지와 족두리 등의 풍습
(2) 소주의 전래, '마마' '수라' 등의 왕실용어
(3) 고려양 : 고려의 옷과 음식, 도자기 등이 원에서 유행하게 된 것을 이르는 말.
3) 농업의 발전 : 농상집요 등 원의 농업기술을 집대성한 책을 고려에 들여와 다시 간행함
4) 의생활의 변화 : 1363년 목화가 들어와 의생활에 획기적 변화를 가져옴 - 면포 생산
5) 최무선의 화약 기술 : 화약과 화포 기술 - 왜구 격퇴에 큰 공을 세움
3. 역사 서술과 성리학
1) 삼국유사, 제왕운기 , 동명왕편
(1) 삼국유사 : 일연이 편찬한 역사서, 민간의 전승과 불교 관계 사적이 풍부하게 기술됨
(2) 제왕운기 : 이승휴가 편찬한 역사서. 중국와 우리나라의 역사를 서사시로 읇은 것.
(3) 동명왕편 : 이규보가 지은 서사시, 고구려의 시조 동명왕의 신비로운 탄생과 건국과정을 그림
2) 성리학 : 13세기 후반 원나라에서 도입. 새로운 학문으로 신흥사대부의 정치적, 사상적 토대가 됨
3) 신진사대부
(1) 불교의 폐단 공격, 성리학에 입각한 사회걔혁을 주장함
(2) 대외적으로 배원.친명 외교, 대내적으로 폐단이 많은 농장을 개혁하여 국가 경제기반 강화 및 민생안정을 주장함.